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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생활

한국사 옳은 내용으로 지문 정리하기 1

by ▩♨○ 2021.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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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직, 지방직 한국사 기출지문 옳은 내용으로 바꿔 지문을 정리하였다. 한국사 전범위 발췌된 기출 문장들이고 틀리게 나온 문장들은 옳은 내용으로 고쳐서 작성하였다. 틀린 문장을 옳게 수정하면서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 또한 있다. 

첨부한 문장도 함께 있지만 틀린 문장을 옳게 수정하면서 약간의 추가 사항을 넣은 것이다. 

 

 

안재홍은 신민족주의를 내세운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이른바 8월 테제를 발표하여 토지 혁명을 제창하였다. 
김구, 김규식은 향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남북협상 막판에 참석했다. 
제헌 국회의원을 정당별로 보면 독. 촉이 55석으로 많았고 무소속이 85석으로 제일 많다. 
이승만은 제헌국회에서 차지한 의석 비율을 참고하여 여러 당파를 아우르는 내각을 구성하고 조봉암 등 중도세력도 등용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 따라 반민족 행위자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74 민청학련 사건 이후 유신체제에 대항으로 야당 정치인과  종교인들 이 민주회복 국민회의를 결성하여 저항하였다. 
장면 내각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련하였다. 
박정희 정부 시기 623 평화통일외교정책 선언이 발표되었다. 
1952년 한미 경제조정 협정을 체결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서당 규칙을 발표하여 개량서당을 탄압하였다. 
조선 태형령(1912)이 시행되던 시기 회사령 공포(1910)를 듣는 상인은 볼 수 없다. 
1930년대 일제는 전국 각지에 대화숙을 설치하여 사상범에게 전향을 강요하였다. 
1920년대 일제는 수풍 발전소와  흥남 질소비료공장을 건설하였다. 1927년
국가총동원법(1938년 4월)에 근거해 육군 특별지원병령을 제정하여 지원병 선발(1938년 2월)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으로 김구가 재직하였다. 
610 만세운동은 1926년이어서 조선 청년 총동맹(1924년)이 결성되는 계기는 아니다. 
의열단의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상해 황포탕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아치를 저격하였다. 
신간회 존속 기간 중 단천 산림 조합 시행령 반대 운동, 원산 총파업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 강점기 노동자 계급이 한식 주택을 2층으로 개량한 영단 주택에 모여 살았다. 상류층 아니다. 
흥선대원군은 경기, 삼남, 해서  등지에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헌종 대에는 세한도가 제작되었다. 추사 김정희가 1844년에 세한도를 제작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강화도 조약 체결 직전 화서학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않았다. 화서학파는 1860년대이다. 
홍재학은 주화 매국의 신료를 처벌하고 서양 물품과  서양서적을 불태울 것을 주장하였다. 
임오군란의 결과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의 유통을 허락하는 조약 체결하지 않았다. 조일 수호 조규 부록 체결하고 일본 화폐의 유통이 이뤄졌다. 
거문도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당오전을 발행하는 기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1차 갑오개혁 때는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을 반포하여  일본 화폐의 유통을 허용하였다. 
대한제국은 만국 우정 연합에 가입하고 만국박람회에 참여하였다. 
대한제국의 지계 발급 사업에서는 개항장에서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인정했다.  개항장 소유 가능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이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초빙하여 1904년에 창간하였으며 고종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친서를 발표하였다. 
숙종은 충무공 이순신의 사우에 현충이라는 호를 내렸다. 
정조는 흉년을 당해 걸식하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구휼하기 위하여 자휼전칙을 반포하였다. 
정조 대에는 한구자와  정리자를 주조하였다. 
순조는 내수사와 궁방 및 각급 관청에 속한 관노비의 장적을 소각하도록 하였다. 공노비 해방
허균은 유재론에서 능력 있는  인재의 적극적인 등용을 주장했다. 
균역법 실시로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를  1 필을 납부하게 하였다. 양반층만은 아니다. 
양명학은 중종 대에 처음 전래되어 이황에 의해 이단으로 비판받았다. 
이익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시세, 행불행, 시비의 순서로  봄으로써 도덕 중심 사관을 비판하였다. 
홍여하의 동국통감제강에서 기자의 전통이 마한을 거쳐 신라로 이어졌다고 하여 기자 마한 신라를 정통 국가로 내세웠다. 

 


위항인들이 편찬한 시집으로는 소대 풍요가 있다. 
태조 때 명으로부터 3년에 1차례 정례적 사신파병을 요청받았다. 
김종직은 국가의 여러 행사 규범을 담은 국조오례의 편찬에 관여하지 않았다. 김종직은 동국여지승람과 관련 있다. 
임진왜란 당시 첨사 정발은 부산포에서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였다. 
기해 예송 당시 송시열은 체이 부정을 내세워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동일한 범죄에 대해서는 신분에 따라 차별적으로 처벌이 따랐다. 
임꺽정의 난(명종)이 일어났던 국왕대에는 회령에서 니탕개가 반란(선조)을 일으키지 않았다. 
잡과에 합격한 기술관은 해당 관청에서 최고 정 3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대전통편은 18세기까지의 법령을 모아 원속중 표식으로 체계화하였다. 
서경덕은  일평생 처사로  지내며 독창적인  유기 철학을  수립하였다. 
조선 태종은 창덕궁, 성종은 창경궁을 새로 건설하였다. 
고려 시대 상층 향리인 호장은 중앙의 상서성에서  임명하였다. 
경정 전시과는 지급액이 전체적으로 감소하였지만 등급의 현직 관료 모두에게 전시를 지급했고  15과 이하는 시지를 지급하지 않았다. 개정 전시과는 16과 이하는 시지 지급 안 했다. 
조선 정조에는 조운량이 증가하자 주교사 소속의 배를 이용하였다. 
고려 시대 개경의 좌창에 있는 곡식은 관리의 녹봉으로 지출되었다. 우창 아니다. 
정도전은 최초의 성리학 입문서인 학자지남도를 편찬하였다. 
제왕운기는 민족 시조인 단군을 강조하고 발해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음서는 고려 성종 때 처음 실시되었다. 
의천은 균여의 화엄학이 실천의 문제를 떠나 지나치게 관념화되어 있음을 비판하였다. 
주심포 양식의 부석사 무량수전은 간결한  팔짝지붕 형태이다. 
김교각은 구화산에서 활동하였고 지장보살의 화신이 되었다. 
원측 해심밀경소를 저술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도교 진흥정책을 써서 불교 사찰을 도관으로 쓰기도 했다. 
무령왕릉에서는 여러 옷차림의 진묘수가 출토되었다. 
발해의 상경은 당나라 도성을 본떠 조방을 나누었다. 
고려 전기에는 중앙 무반에게 문산계를 제수하였다.  문산계에는 향리, 탐라 왕족, 여진 추장, 악공, 공인, 노병이 있다. 
이자겸은 아들을 출가시켜 현화사 불교 세력과  강력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려 숙종 대에는 평양에 기자를 숭배하는 기자 사당을 세워 국가에서  제시하기 시작했다. 
정동행성의 숭상은 고려왕이 전담하였다.  다루가치 아니다. 
고구려는 소노부는 자체의 종묘와  자식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부여는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명을 청하였다. 
고구려는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그 주위에  송백을 심었다. 
장수왕 때는 북연 왕인 풍홍을 둘러싸고 북위 및 송과 갈등을 빚었다. 
무령왕은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했다는 서신을 전했다. 
백제 고이왕 때 관등제의 골격을 마련하고  낙랑군 대방군과  공방을 벌였다. 
지증왕대에는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경덕왕대에는 충담사가 지은 향가 안민가가 만들어졌다. 
9주 5 소경 설치와  대공의 난은 (신라 중대) 발발 사이 시기에 청주의 거로현을 국학생의 녹읍(신라하대 소성 왕대)으로 삼지 않았다. 
민정 문서에는 호구와는 달리 전답 면적의 증감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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